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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

동농 김가진

동농 김가진 선생은 1846년 1월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청년기에 청국에서 발발한 아편전쟁과 양무운동을 보면서 개화사상에 눈뜨기 시작했습니다.

1877년 11월 상경하여 문과에 급제하고 규장각 참서관으로 등용되었습니다. 이후 1882년 7월 인천항 통상사무아문 주사, 1886년 10월 텐진 주재 종사관, 1887년 7월 주차일본공사관 참찬관, 1891년 7월 특명주차일본전권대신 등을 역임하며 ‘조선의 외교관’으로 활약했습니다. 선생은 조오수호통상조약 체결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조선의 자주외교를 주도했습니다.

이 시기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한반도는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습니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 청·일 양군이 조선 땅에 진주하자, 조정은 1894년 5월 일본의 외교 압력을 무마하고자 동농 김가진 선생을 참의내무부사에 임명했습니다. 선생은 풍전등화 같은 조선을 살리기 위해 고종의 명을 받아 208조의 개혁안을 기초하는 등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1895년 4월 농상공부대신이 되었으며, 1896년 2월에는 중추원 일등의관으로 자리를 옮겼고, 1897년 5월에는 황해도 관찰사, 1900년에는 중추원 의장, 1902년에는 궁내부 특진관, 1906년에는 충청관찰사에 임명되었습니다. 특히 선생은 1899년 2월 사립양잠회사를 설립하고 전습소를 열어 잠업학을 가르치는 등 근대 양잠, 제사, 견직업의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습니다.

1907년 규장각 제학을 끝으로 관직을 떠난 동농 김가진 선생은 대한협회의 회장으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대한협회는 계몽운동 성향의 단체였는데, 특히 식산흥업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추진하고 계몽교육에도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선생은 소위 한일합방을 주장하는 일진회와 정면으로 맞서 싸웠고, 1910년 경술국치의 해에는 대한협회 회장의 자격으로 강제 병합을 마지막까지 반대했습니다.

동농 김가진 선생은 강제 병합 이후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작위를 받았지만 은사금의 수령은 거부했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백운장을 빼앗는 등 선생에게 빈한한 생활을 강요했지만, 독립을 향한 선생의 의지는 꺾지 못했습니다. 고종 서거 후, 선생은 곧바로 독립운동에 투신해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국내 최대의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설립하고 총재가 되었습니다. 선생은 독립선언서와 진정서, 경고문의 배포 계획을 세우는 등 만세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운동 거점을 국외로 옮기기 위해 1919년 10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한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일본과의 혈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기고문을 작성했고, 이를 위한 군자금 모집과 조선 내 지부 설립에 적극적으로 관여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동농 김가진 선생은 1921년 북로군정서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전쟁을 이어갔습니다. 만주에서 조선민족대동단을 재건하고 독립군에 합류하는 등 끝까지 독립운동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열악한 망명 생활 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독립을 마주하지 못한 채 상하이에서 서거했습니다.